나의 이야기

[스크랩] 영일정씨 평가

바보 한스 2010. 12. 1. 13:21

영일정씨(迎日鄭氏)의 원류에 대하여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이미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육촌중(六村中) 자산 진지부(珍支部)의 촌장이었던 지백호(智伯虎)가 유리왕(儒理王) 9년(서기 32년)에 정(鄭)씨로 사성(賜姓)되었던 것이 이 성씨의 연원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정(鄭)씨는 후대에 여러 갈래로 갈라져 본관을 달리하나 모두 이 지백호(智伯虎)의 후예(後裔)들인 셈이다.
영일정씨(迎日鄭氏)의 원류는 지백호(智伯虎)로 하나, 연대가 워낙 오래고 고증이 없으므로 계대(系代)를 상고(詳考)할 수 없어 지백호(智伯虎)의 원손(遠孫) 종은(宗殷)(간의대부(諫議大夫))을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후손에 의경(宜卿)이 영일호장(迎日戶長)을 지냈고, 또한 영일현백(迎日縣伯)에 봉해졌으므로 그 후손들이 본관을 영일(迎日)로 하였다 한다. 본관을 영일(迎日)의 옛 지명을 따라 연일(延日)로, 영일에서도 본고장인 오천(烏川)마을 이름을 따서 오천(烏川)으로 쓰기도 했으나 근래에는 영일(迎日)로 통일해 쓰고 있다.
그런데 영일정씨(迎日鄭氏)에서는 연원은 같으면서도 소목(昭穆)을 밝히지 못하는 두 파가 있는데, 그 하나는 고려 의종(毅宗) 때의 중신(重臣)으로 추밀원(樞密院) 지주사(知奏事)를 지낸 습명(襲明)을 1세조(世祖)로 하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정몽주(鄭夢周)ㆍ정문예(鄭文裔)계(系))와 고려 때 감무(監務)를 지낸 극유(克儒)를 1세조(世祖)로 하는 감무공파(監務公派)(정사도(鄭思道)ㆍ정철(鄭澈)계(系))가 그것이다.
이 두 파는 선계(先系)의 실전(失傳)으로 서로 촌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세계(世系)를 고증할 길이 없어 합보(合譜)를 하지 못하고 있으며 동원(同源)이면서도 족보 편찬과 종친회 활동은 각각 하고 있다.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에서는 포은(圃隱)을 낳고 감무공파(監務公派)에서는 송강(松江)을 낳아 영일정씨(迎日鄭氏)의 이름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는 포은(圃隱)의 순절 이후 이조에서는 여조(麗朝)의 충절로 경원(敬遠)받는 가문이 되어 현직(顯職)으로 크게 떨치지 못한 반면 국가 유사시(有事時)마다 충절로 대를 이었으며 한편 감무공파(監務公派)는 조선조에서도 4명의 재상(宰相)과 3명의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하는 등 융성을 누렸다.
본편에서는 두 파를 따로 구분하여 소개하되, 등과인명(登科人名)과 벌열(閥閱) 등은 한데 묶었다.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 기세조(起世祖)는 정습명(鄭襲明), 호(號)는 동하(東河). 고려 예종조에 향공시문과(鄕貢試文科)에 올라 옥당(玉堂)과 한림(翰林)을 거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에 이르렀고 형양군(滎陽郡)에 봉해졌다고도 한다.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육촌장(六村長)의 일인(一人)인 지백호(智伯虎)로 하나 그 뒤의 세계(世系)가 확실(確實)치 않아 정습명(鄭襲明)을 기세조(起世祖)로 하고 있다. 원파록(源派錄)을 비롯하여 모든 족보에 선조(先祖)는 형양공(滎陽公) 정습명(鄭襲明)으로만 기록하고 있다.

 

감무공파(監務公派) 시조는 정종은(鄭宗殷). 신라 태종 무열왕 때 간의대부(諫議大夫)로 김유신(金庾信) 장군과 협

의, 신라의 삼한통일(三韓統一)에 공을 세웠다. 그 뒤 왕께 간언(諫言)한 것이 화가 되어 인동(仁同)의 약목현(若木縣)

에 유배,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그런데, 그 뒤의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고려 때 감무(監務)를 거쳐 현감(縣

監)을 지낸 정극유(鄭克儒)를 起世祖로 하여 세대(世代)를 잇고 있다.

본관지 연혁
영일(迎日)(또는 연일(延日))은 본래 신라의 근오지현(斤烏支縣)이다.
경덕왕 때 임정현(臨汀縣)으로 개칭, 의창군(義昌郡)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고 고려조에 영일(迎日)로 고쳐 현종 때 경주(慶州)에 소속시켰다.
조선조 태종 때 진(鎭)을 두어 병마사(兵馬使)가 지현사(知縣事)를 겸하게 하였으며 세종 때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로 고쳤다가 후에 현감(縣監)을 두었다.
1895년 군(郡)이 되었고 1914년 청하(淸河)ㆍ장자ㆍ흥해(興海)의 3군(郡)을 합하였으며 1955년 포항(浦項)이 시(市)로 승격한 뒤 군(郡)에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주요 성씨로 정(鄭)ㆍ승(承)ㆍ노(盧)ㆍ오(吳)씨 등이 있었다.
파명록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

포은공파(圃隱公派)ㆍ생원공파(生員公派)ㆍ문계공파(文繼公派)ㆍ문손공파(文孫公派)ㆍ사정공파(司正公派)ㆍ정랑공

파(正郞公派)ㆍ만호공파(萬戶公派)ㆍ도사공파(都事公派)

감무공파(監務公派) 정원공파(靖元公派)-강화공파(江華公派)ㆍ원평공파(原平公派)ㆍ부마공파(駙馬公派), 정숙공파

(貞叔公派)-판결사공파(判決事公派)ㆍ이의공파(吏議公派)ㆍ위양공파(威襄公派)ㆍ김제공파(金堤公派), 오성군파(烏

城君派)

주요 세거지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 ‘신유보(辛酉譜)’서(序)에 의하면 시조 정습명(鄭襲明)의 대부터 경북 영일(迎日)에 세거하였다. 9세 정광후(鄭光厚)와 10세 정운관(鄭云瓘)의 대를 전후하여 영천(永川)으로 옮겨 갔는데, 영천(永川) 고천우항리(古川愚巷里)에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옛집이 있었다고 한다. 포은(圃隱)의 「제성역(諸城驛)」이란 시(詩)에서도 “영천(永川)과 오천(烏川)은 모두 나의 고향이다”라고 하여 선조들이 그곳에서 세거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말에 정몽주(鄭夢周)가 순절(殉節), 가문(家門)이 위기를 맞자 전공판서(典工判書)였던 정인언(鄭仁彦)이 아들 공

조판서(工曹判書) 정광후(鄭光厚)와 함께 영천남전촌(永川南錢村)으로 은거(隱居)하게 됨으로써 영천(永川)이 세거지

(世居地)가 된 것이다.

15세 정증(鄭增)의 대부터는 합천(陜川)에 터를 잡았고, 16세 정세태(鄭世太)의 대부터는 영흥군(永興郡) 진평면(鎭平

面) 일원에 세거하였다.

정세명(鄭世命)은 조선 인종조 을사사화(乙巳士禍)를 피해 단성(丹城)에 갔다가 경주(慶州)에 터를 잡았고, 정세개(鄭

世凱)의 대부터는 옥구(沃溝)에 세거한 것 같다.

15세 정징(鄭澄)의 대부터는 한산(韓山)ㆍ구성(構城)에, 정청(鄭淸)의 대부터는 고성군(高城郡)에, 정홍(鄭洪)의 대부

터는 파주(坡州)ㆍ통천(通川)에, 정소(鄭沼)의 대부터는 춘천(春川)ㆍ홍천(洪川)ㆍ양양(襄陽) 등지에 터를 잡은 것 같

다.

15세 정식(鄭湜)의 대부터는 함북 회령군(會寧郡) 영산면(靈山面) 일원에 세거했고, 정정(鄭淨)의 대 이후에는 함남 문

천군(文川郡) 명호면(明湖面), 안변군(安邊郡) 상도면(上道面), 영흥군(永興郡) 순령면(順寧面)에 터를 잡았으며, 정제

(鄭濟)의 대부터는 정평군(定平郡)에 세거했으며, 정도(鄭渡)는 세조조 병자년(丙子年)에 사육신사건에 연루되어 강원

도 삼척군(三陟郡)에 옮겨갔다.

한편 ‘교리공파보(校理公派譜)’서(序)에 의하면 13세 정이교(鄭以僑)는 금릉군(金陵郡) 봉산면(鳳山面)에 이거하여 자

손들이 대대로 금릉군(金陵郡)에서 세거하였다.

16세 이후에는 선산(善山)ㆍ경산(慶山)ㆍ하양(河陽)ㆍ달성(達城)ㆍ울산(蔚山) 일원과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

 등지에도 터를 잡은 것 같다. 특히 포은공(圃隱公)의 후손들은 용인(龍仁)ㆍ부여(扶餘)ㆍ화성(華城)ㆍ평택(平澤)ㆍ수

원(水原)ㆍ천안(天安)ㆍ해주(海州)ㆍ선산(善山)ㆍ여주(驪州)ㆍ예산(禮山)ㆍ공주(公州)ㆍ청도(淸道)ㆍ군위(軍威)ㆍ영

일(迎日)ㆍ장자ㆍ예천(醴泉)ㆍ안동(安東)ㆍ의성(義城)ㆍ상주(尙州)ㆍ영주(榮州)ㆍ단양(丹陽)ㆍ음성(陰城)ㆍ제천(堤

川) 등지를 비롯, 양평(楊平)ㆍ파주(坡州)ㆍ강화(江華)ㆍ장흥(長興)ㆍ삼척(三陟)ㆍ울진(蔚珍)ㆍ고성(高城)ㆍ월성(月

城)ㆍ사천(泗川) 등지에 세거하여 왔다.

생원공파(生員公派)의 후손은 사천(沙川)ㆍ대천(大川)ㆍ능계(陵溪)ㆍ대평(大平)ㆍ금호(琴湖)ㆍ괴산(槐山)ㆍ대전

(大田)ㆍ의성(義城)ㆍ칠곡(漆谷)ㆍ구미(龜尾)ㆍ김해(金海)ㆍ황간(黃澗)ㆍ성주(星州)ㆍ왜관(倭館)ㆍ경산(慶山)ㆍ밀양

(密陽)ㆍ달성(達城)ㆍ영일(迎日)ㆍ울산(蔚山)ㆍ상주(尙州) 등지에 세거하여 왔다. 문계공파(文繼公派)의 후손은 영천

(永川)일원에, 문손공파(文孫公派)는 공산(公山)과 울산(蔚山)에, 사정공파(司正公派)는 부산(釜山)ㆍ하송(下松)ㆍ하

곡(霞谷)ㆍ야일(也日)ㆍ대동(大同)ㆍ동래(東萊)ㆍ양산(梁山)ㆍ흥해(興海)ㆍ물률(勿栗) 등지에 성거(盛居)하여 왔다. 또 정랑공파(正郞公派)의 후손은 경산(慶山)ㆍ충주(忠州)ㆍ서면(西面)ㆍ봉화(奉化) 등지에, 만호공파(萬戶公派)는 경

주(慶州)ㆍ월성(月城)ㆍ울산(蔚山)ㆍ선동(仙洞) 등지에, 도사공파(都事公派)의 후손은 경주(慶州)ㆍ영일(迎日)ㆍ자양

(紫陽)ㆍ죽장(竹長)ㆍ장자ㆍ포항(浦項)ㆍ울진(蔚珍) 등지에 세거하여 왔다.

그리하여 1930년 당시 영일 정씨(迎日鄭氏)는 경기도 연천(漣川)ㆍ이천(利川)ㆍ용인군(龍仁郡), 강원도 통천(通川)ㆍ

고성(高城)ㆍ명주(溟州)ㆍ삼척(三陟)ㆍ횡성군(橫城郡), 충북 영동(永同)ㆍ옥천군(沃川郡), 경북 의성(義城)ㆍ영일(迎

日)ㆍ경산(慶山)ㆍ영천(永川)ㆍ금릉(金陵)ㆍ칠곡(漆谷)ㆍ선산군(善山郡), 경남 사천(泗川)ㆍ하동(河東)ㆍ합천군(陜川郡), 황해도 벽성(碧城)ㆍ평산(平山)ㆍ봉산군(鳳山郡), 평남 맹산(孟山)ㆍ중화(中和)ㆍ용강(龍岡)ㆍ안주(安州)ㆍ운산

군(雲山郡), 함남 정평(定平)ㆍ영흥(永興)ㆍ고원(高原)ㆍ문천(文川)ㆍ이원(利原)ㆍ경성(鏡城)ㆍ명천군(明川郡) 일원

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의 경우 1981년에 경기도 용인(龍仁)ㆍ고양(高陽), 강원도 삼척(三陟)ㆍ고성(高城)ㆍ강릉(江

陵), 경북 영일(迎日)ㆍ영천(永川)ㆍ경산(慶山)ㆍ금릉(金陵)ㆍ월성(月城)ㆍ경주(慶州)ㆍ대구(大邱), 경남 하동(河東)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용인(龍仁)이 세거지(世居地)가 된 시원(始源)은 정몽주(鄭夢周)가 태종 3년 충신(忠臣)으로 추존되고 용인(龍仁)을

 사패지(賜牌地)로 하사받은데에 연유한다. 그리하여 수백년동안 자손들이 그곳에 정착, 번연(繁衍)하게 되었다. 특히

용인군(龍仁郡) 모현면(慕賢面) 능원리(陵院里)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그의 7세손 정준

(鄭儁)이 병자호란을 겪은 뒤 벼슬을 버리고 터를 잡음으로써 집성촌이 이루어졌다. 선조조 마을에 포은(圃隱)을 모시

는 충렬서원(忠烈書院)이 세워졌고, 기호유림(畿湖儒林)의 한 본산으로 등장하기도 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인하

여 한가한 마을이 되었다. 현재 마을의 40여 가구가 모두 정씨(鄭氏) 한 집안이라 한다.

1981년의 조사(調査)에서 밝혀진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의 집성세거지(集姓世居地)로 꼽힌 지역(地域)은 경기도 용

인(龍仁)ㆍ고양(高陽), 경북(慶北)의 영천(永川)ㆍ영일(迎日)ㆍ경산(慶山)ㆍ금릉(金陵)ㆍ월성(月城)ㆍ경주(慶州)ㆍ대

구(大邱), 경남(慶南)의 하동(河東), 강원도의 삼척(三陟)ㆍ고성(高城)ㆍ강릉(江陵) 등지였다.

 

감무공파(監務公派) ‘신유보(辛酉譜)’에 의하면 1세 정극유(鄭克儒)의 대이전부터 영일군(迎日郡)에 세거하였다.

8세 정진(鄭鎭)은 경기도 장단군(長湍郡)으로 옮겨갔고, 일부가 고손 정기(鄭沂)의 대이후 여주군(驪州郡)에서 터를

잡았다. 정기의 손자 정도우(鄭道祐)는 대구(大邱)로 이거하였고, 후손들이 경산(慶山)ㆍ칠곡(漆谷) 등지에 산거(散居)

하였다. 정진(鄭鎭)의 둘째 아들 정효순(鄭孝順)의 아들 정석례(鄭錫禮)의 대에는 음성군(陰城郡)에 터를 잡았고, 13세

 정수의(鄭守義)의 대이후에는 고양군(高陽郡)에서 세거하였다. 정진(鄭鎭)의 다섯째 아들 정효전(鄭孝全)은 지금의

김포군(金浦郡)에 터를 잡고 살았으며, 일부가 증손 정탁(鄭濯)의 대이후로 강원도 금화(金化)ㆍ철원(鐵原) 일원에 세

거했고, 정렬(鄭洌)의 대에는 해남군(海南郡)으로 옮겨갔다. 일부는 18세 정사중(鄭司中)의 대이후 황해도 평산군(平

山郡)으로 이거하였다. 한편 8세 정연(鄭淵)의 대를 전후해서는 파주군(坡州郡)에 터를 잡았고, 일부가 증손 정학년(鄭

鶴年)의 대에 경북 청도군(淸道郡)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일부는 14세 정제(鄭濟)의 대이후 인천(仁川)에서 세거하며,

 청양군(靑陽郡)ㆍ서천군(舒川郡)ㆍ당진군(唐津郡)ㆍ고창군(高敞郡) 일원으로 산거(散居)하였고, 15세 정호(鄭豪)는

고성(高城)에 터를 잡은 것 같다. 16세 이후로는 익산군(益山郡)ㆍ공주군(公州郡)ㆍ음성군(陰城郡) 등지로 세거지를

 확대하였다. 정연(鄭淵)의 둘째ㆍ세째 아들 정자양(鄭自洋)ㆍ정자제(鄭自濟)의 대에는 고양군(高陽郡)에 터를 잡았

고, 정자양의 손자 정충남(鄭忠男)은 영동군(永同郡)으로, 정종남(鄭終男)은 옥천군(沃川郡)으로 이거하였다. 정자제

의 아들 정록은 평산군(平山郡)으로 옮겨갔고, 손자 정언탁(鄭彦濯)은 제천군(堤川郡)에 터를 잡았으며, 정문림(鄭文

淋)은 경주(慶州)에서 시거(始居)하였다. 정연(鄭淵)의 네째 아들 정자숙(鄭自淑)의 후계 중 12세 정소(鄭沼)는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순천(順天)에 은거, 터를 잡았고, 14세 정성(鄭晟)은 고부(古阜)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15세 이후로는 제천(堤川)ㆍ충주(忠州)ㆍ진주(鎭州)ㆍ여주(驪州) 원주(原州) 등지에 산거(散居)하였다. 8세 정훈(鄭勳) 정사흠(鄭思欽)의 대부터는 안동군(安東郡)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

씨족史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의 시조인 정습명(鄭襲明)은 ‘고려사’에 실린 그의 열전에 의하면 향공진사(鄕貢進士)였다. 지주사공(知奏事公)의 후손으로는 고려말의 명신(名臣)이며 한국사상 절의(節義)의 대표자로 일컬어지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있다. 그러나 이 파(派)는 포은(圃隱)의 순절 이후 조선조에서 크게 떨치지는 못했다. 조선후기 현종 때 상신(相臣)을 지낸 정유성(鄭維城)을 내었을 뿐이다.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의 분파(分派)는 지주사공(知奏事公)의 10세손을 파조(派祖)로 하여 8개파(派)로 나누어진다.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 포은공파(圃隱公派), 정문예(鄭文裔)의 후손이 생원공파(生員公派), 정문계(鄭文繼)의 후손

이 문계공파(文繼公派), 정문손(鄭文孫)의 후손이 문손공파(文孫公派)다. 정문비(鄭文備)의 후손이 사정공파(司正公

派), 정문욱(鄭文彧)의 후손이 정랑공파(正郞公派), 정형지(鄭亨之)의 후손이 만호공파(萬戶公派), 정희손(鄭希孫)의

 후손이 도사공파(都事公派)이다.

이들을 다시 정리하면 11세(世)에서 제(第)1파(派)가 몽주공파(夢周公派)이며 제(第)2파(派)가 문예공파(文裔公派)이

다. 제(第)3파(派)가 문단공파(文斷公派), 제(第)4파(派)는 문손공파(文孫公派)이며 제(第)5파(派)가 문비공파(文備公派)이다. 또 제(第)6파(派)가 문욱공파(文彧公派)이며 제(第)7파(派)가 형지공파(亨之公派)이다. 제(第)8파(派)는 희손공파(希孫公派)가 되었다. 영양공(榮陽公)자손은 8파(派)로 분파(分派)되었다.

 이제 후손들의 주거지(主居地)를 각 파순(派順)으로 기재(記載)하면 제(第)1파(派)인 포은정몽주(圃隱鄭夢周)후손은

현재 포은묘(圃隱墓) 소재지인 용인군(龍仁郡) 모현면(慕賢面)을 비롯하여 서울ㆍ고양(高陽)ㆍ단성(丹城)ㆍ진주(晋

州)ㆍ하동(河東)ㆍ해주(海州)ㆍ부여(扶餘)ㆍ화성(華城)ㆍ평택(平澤)ㆍ수원(水原)ㆍ천안(天安)ㆍ선산(善山)ㆍ예천(醴

泉)ㆍ안동(安東)ㆍ여주(驪州)ㆍ예산(禮山)ㆍ의성(義城)ㆍ상주(尙州)ㆍ영주(榮州)ㆍ경주(慶州)ㆍ단양(丹陽)ㆍ영일(迎

日)ㆍ군위(軍威)ㆍ음성(陰城)ㆍ제천(提川)ㆍ양평(楊平)ㆍ파주(坡州)ㆍ강화(江華)ㆍ고성(固城)ㆍ사천(泗川) 등지에 세

거(世居)하고 있다.

제(第)2파(派) 생원공(生員公) 후손은 영천(永川)ㆍ사천(沙川)ㆍ능계(陵溪)ㆍ대평(大平)ㆍ금호(琴湖)ㆍ괴산(槐山)ㆍ

대전(大田)ㆍ의성(義城)ㆍ구미(龜尾)ㆍ금릉(金陵)ㆍ김해(金海)ㆍ황간(黃澗)ㆍ성주(星州)ㆍ왜관(倭館)ㆍ경산(慶山)ㆍ

밀양(密陽)ㆍ달성(達城)ㆍ영일(迎日)ㆍ울산(蔚山)ㆍ상주(尙州) 등지에 세거(世居)하였다.

제(第)3파(派)인 문단공(文斷公) 후손은 영천(永川) 일원에, 제(第)4파(派)인 문손공파(文孫公派)는 공산(公山)과 울산

(蔚山)에 세거(世居)하고 있으며 제(第)5파(派)인 사정공파(司正公派) 후손은 하송(下松)ㆍ하곡(霞谷)ㆍ야동(也洞)ㆍ

육국(六國)ㆍ동래(東萊)ㆍ양산(梁山)ㆍ흥해(興海)ㆍ물률(勿栗) 등지에 세거(世居)한다. 제(第)6파(派)인 정랑공파(正

郞公派) 후손은 경산(慶山)ㆍ충주(忠州)ㆍ봉화(奉化) 등지에, 제(第)7파(派)인 도사공파(都事公派)의 후손은 경주(慶

州)ㆍ영일(迎日)ㆍ자양(紫陽)ㆍ죽장(竹長)ㆍ장자(長䰇)ㆍ포항(浦項)ㆍ울진(蔚珍) 등지에 세거(世居)하며 제(第)8파

(派)인 도사공파(都事公派) 후손은 영일(迎日)ㆍ포항(浦項)ㆍ의창(義昌) 등지에 세거(世居)하고 있다.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의 시조인 정습명(鄭襲明)은 고려 인종, 의종 때의 명신(名臣)이다. 향공진사(鄕貢進士)로 등

제(登第)하여 내시(內侍)에 속하였다. 인종조의 국자사업(國子司業), 기거주지제고(起居注知制誥)를 지냈다. 낭사(郎

舍) 최재(崔梓), 재상(宰相) 김부식(金富軾) 등과 시폐(時弊)10조(條)를 상서(上書)하였다. 간신(諫臣)으로서 시폐(時

弊)를 개혁하고자 하는 강직한 일면을 볼 수 있다. 예부시랑(禮部侍郞)을 거쳐 의종이 즉위하자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가 되었다. 의종이 원자(元子)였을 때 정습명(鄭襲明)이 시독(侍讀)이 되었는데, 인

종과 임후(任后)(공예태후(恭睿太后))는 원자(元子)가 제왕(帝王)의 그릇이 못된다고 여겨 둘째 아들로 태자(太子)를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정습명(鄭襲明)이 진심으로 받들어서 원자(元子)(의종)를 폐하지 않았다. 그는 간관직(諫官職)

에 오래 있었는데 쟁신(諍臣)의 풍모가 있어서 인종이 귀중하게 여겼다. 태자(太子)의 앞날을 부탁하였고, 임종에 다다

라 의종을 불러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마땅히 습명(襲明)을 써라”고 하였다. 정습명(鄭襲明)은 선왕(先王)의 명에 따

라 의종에게 직언(直言)을 늘 하였고, 혹시나 시류(時流)에 영합할까 염려하여 하지 않는 얘기가 없었다. 의종은 바른

말하는 그를 꺼렸을 뿐 아니라 다른 관료들도 그를 헐뜯었다. 드는 왕이 자신을 꺼리는 것을 알고 스스로 약을 먹고 죽

었는데, 그가 죽은 후 의종의 방탕함은 법도가 없어졌다. 정습명(鄭襲明) 같은 강직한 간신(諫臣)의 얘기에 귀를 기울

였더라면, 의종은 후일 신하(臣下)의 손에 죽음을 당(當)하는 비극은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3대손 정인신(鄭麟信)은 태학박사(太學博士)였고 3대손 정지태(鄭之泰)는 전서(典書)로 지냈으며 5대손 정종흥(鄭宗

興)이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과 감문위대호군(監門衛大護軍)에 올랐다.

6대손 정림(鄭林)은 판도판서(版圖判書), 그의 큰아들 정인수(鄭仁壽)는 군기감(軍器監)으로 정몽주(鄭夢周)의 증조부

가 되고 둘째아들 정인언(鄭仁彦)은 전공판서(典工判書)에 올라 충혜왕(忠惠王) 이하 3대왕을 섬긴 중신(重臣)이었다.

 그리고 8대손인 정유(鄭裕)는 직장(直長)이었고 정광후(鄭光厚)는 고려조에 문과(文科)에 올라 검교한성윤(檢校漢城

尹)ㆍ상주목사(尙州牧使) 등을 역임했으나 정몽주(鄭夢周)의 순절을 보고 벼슬을 버린 뒤 영천(永川)의 천민촌(賤民

)인 전촌(錢村)에 숨었다가 뒤에 공조판서(工曹判書)로 강압에 의해 제수받은 분이다.

고려말의 절신(節臣)으로 조선조 5백년간 유학자들의 추앙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이 빛나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는 정습명(鄭襲明)의 10세손이다. 시조 할아버지의 이름에 뒤지지 않는 후손이라 하겠다.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종(祖宗)으로 추앙받는 정몽주(鄭夢周)는 1337년(충숙왕 6년)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어렸

을 때부터 비범한 재능이 보였다 한다. 9세 때 외가집에서 부리는 여종이 군에 나간 남편에게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하

자 夢蘭(몽란)(당시의 이름) 소년은 그 자리에서 「구름은 모였다 흩이지고 달은 찼다 이지러지지만 첩의 마음은 항상

변치 않습니다」(雲聚散月盈虧 妾心不移)라고 써주었다. 단 10자의 한시로 남편을 그리는 아내의 마음을 표현한 9세

소년의 비범함을 볼 수 있다. 그는 또 대단한 효자였다. 19세에 아버지를 여의자 3일 동안이나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통곡했으며 묘소 앞애 움막을 짓고 3년 동안이나 무덤을 지키면서 상식(上食)을 올렸다. 그는 어머니의 상을 당해서는

 3년을 여묘(廬墓)했다. 그의 효성이 전해지자 정부에서는 집에 정표(旌表)하였다. 당시의 사대부가 백일(百日) 탈상하

였는데 그는 부모상에 모두 3년씩 여묘하였으니 당대와 후대의 유학자들에게 칭송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공민왕 9년 三場에 연달아 장원 급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공민왕 13년 병마사(兵馬使) 이성계(李成桂)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여진(女眞)의 삼선(三善)ㆍ삼개(三介)를 화주(和州)에서 격퇴하였다. 전농사승(典農寺丞), 예조정

랑(禮曹正郞), 사성(司成)을 거쳐 공민왕 21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에 다녀왔다. 우왕 때 대사성(大司成), 혹당문

학(或堂文學), 삼사좌사(三司佐使)를 거쳐 창왕 때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이성계와 같이 공양왕을 세우고 문하찬

성(門下贊成) 등 여러 벼슬을 받고, 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에 봉해져서 좌명공신(佐命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1392년(공양왕4)에 대명률(大明律)을 새로 찬정(撰定)해 바쳤다. 정몽주(鄭夢周)는 외교에도 뛰어난 수완을 보여 명

(明)ㆍ왜(倭)에 여러 차례 사신으로 가 원(元)ㆍ명(明) 교체기의 긴박한 국제정세 속에 고려의 위치를 확보하고 우호

 관계를 다지는데 기여했다. 한편 성리학(性理學)에 매우 밝아 개성(開城)에 5부학당(五部學堂)과 지방에 향교(鄕校)

를 세워 교육진흥에 힘썼는가 하면, 의창(義倉)을 설립, 빈민구호에 힘썼다. 문신이면서도 1380년엔 조전원수(助戰元

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전라도 운봉(雲峰)에서 왜구를 격파하는 등 국방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포

은(圃隱)이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게 된 것은 고려조에 대한 그의 충성과 절의에 의해서이다. 고려의 전군(全軍)을 동

원하여 이루어진 우왕14년의 요동정벌에서 군사지휘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성계(李成桂)세력은 최영(崔瑩)장군을

 제거한 후 새 왕조 개창작업을 착착 진행시켜 나갔다. 따라서 역성혁명(易姓革命)보다는 고려조를 유지한 채 사회의

 모순을 개혁하고자 하는 고려의 신하들과 대립하게 되었다.이 고려 충성파의 대효가 포은이었다. 이성계세력에서는

집요하게 그를 회유하였으나 그는 고려에의 충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그 유명한 「하여가(何如

歌)」와 「단심가(丹心歌)」이다. 포은(圃隱)은 고려가 망하던 1392년(공양왕4년) 4월 이성계(李成桂)의 아들이며 조

선건국에 큰 공을 세운 이방원(李芳遠)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에 의해 개성 선지교(選地橋)에서 피살되었다. 그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 자리에 푸른 대나무가 솟아나 다리 이름이 선죽교(善竹橋)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그가 죽은 지 3개

월만에 새 왕조 조선이 들어섰다.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은 역사의 흐름이어서 거스를 수 없었다 해

도, 정권의 변동기에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절의를 지킨 그의 정신은, 단지 유학자적 절개만이 아니라, 현대를 사는 오늘날에도 가르쳐주는 바가 많은 것이다. 포은(圃隱)은 불궤(不軌)(반역)를 꾀했다 해서 조선 국초에는 계속 단죄되었

다. 그러나 그는 정치권력 변혁기의 속죄양이었기에 조만간 복권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의 개국공신이나 그 후손들은

포은의 복권에 대해 계속 반대했지만, 그를 죽인 태종 자신에 의해 복권되었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

대제학겸 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府事 修文殿大提學兼 藝文春秋館事 益陽府院君)이 추증

되고 문충(文忠)의 시호가 내렸으며 자손에게 토지와 관직을 내렸다. 중종 때 문묘에 모셔졌다. 문집 ‘포은집(圃隱

集)’이 전한다.

정보(鄭保)는 포은(圃隱)의 손자이다. 조선왕실의 회유책으로 정(鄭)씨들은 조선조 세종조부터 다시 관직에 나아갔다.

 정보는 예안현감(禮安縣監)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 관직을 역임했는데,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쿠데타로 단종이

 쫓겨나자 벼슬을 떠났다.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그들이 사형에 처하게 되자 “성삼문(成三問) 등은 의인이니 죽이면

 후세에 비난을 받을 것”리하고 직언을 한 것이 세조의 귀에 들어가 사형의 극형을 받았으나 포은의 손자라 하여 감형

돼 경남 단성(丹城)에 유배당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포은(圃隱)의 순절로 1차 화를 입은 뒤 9년 만에 복권돼 벼슬길에 나섰던 정(鄭)씨들은 불과 50여년 만에 또다시 정보

(鄭保)의 피화로 조선조의 벼슬과 인연이 멀어졌다. 후손 중에서 유일하게 정유성(鄭維城)이 우의정으로 정승에 올랐

고 2명의 판서(判書)가 있으나, 오히려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에 힘쓰는 가풍이 전해져왔다고 한다.

圃隱의 큰아들 정종성(鄭宗誠)은 원사공파(院事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는데 포은이 복권된 뒤 태종이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였다. 그뒤 세종이 소명(召命)하자 64세의 고령(高齡)으로 철원부사(鐵原府使)에 부임한 뒤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69세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둘째 아들 정종본(鄭宗本)은 사예공파(司藝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정종소(鄭從韶) : 자(字)는 사정(司貞), 호

(號)는 정헌(靖軒). 1447년(세종29) 문과에 급제한 후 선균관사성(成均館司成)에 올랐으나 1456년(세조2) 성삼문(成三

問)ㆍ박팽년(朴彭年) 등이 단종(端宗)의 복위를 꾀하려다가 실패하여 처형되었던 사건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

여 은거생활을 하며 학문에 전념했다.

정세아(鄭世雅) : 1335~1612년(광해군4) 자는 화숙(和淑), 호는 호수(湖叟), 시호는 강의(剛義). 윤량(允良)의 아들.

1558년(명종1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규합, 대장이 되어 영천(永川)의

 적을 격퇴, 이듬해 서울이 수복되자 군사를 조희익(趙希益)에게 맡기고 자양(紫陽)에 돌아갔다. 체찰사(體察使) 이원

익(李元翼)의 추천을 받아 여러 차례 기용되었으나 사양하다가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을 잠시 지내고 곧 사직, 장현

광(張顯光)ㆍ조호익(曺好益)ㆍ이준(李埈)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후진을 양성했다. 병조판서에 추증(追贈), 영천(永川)

의 환고사(環皐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정의번(鄭宜藩) : 1560~1592년(선조25) 자는 위보(衛甫), 호는 백암(栢巖). 세아(世雅)의 아들. 1585년(선조18) 사마

시(司馬試)에 합격,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친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영천(永川)에서 승리, 이어 경주(慶州)에

진격하여 싸우다가 적에게 포위당해 위기에 빠진 아버지를 구출, 혈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영조 때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되고 영천의 환고사(環皐祠)에 제향되었다.

정대임(鄭大任) : 1553(명종8)~1594(선조27) 자는 중경(重卿), 호는 창대(昌臺).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자 의병을 모아 당지산(唐旨山)에서 복병으로 적을 대파, 이어 영천(永川)에서 전공을 세우고 이듬해 돌격장(突擊將)

으로 울산태화진(蔚山太和津)에서 역전한 공으로 예천군수(醴泉郡守)가 되었다. 1594년 무과에 급제한 뒤 왜군과 싸

우다 전사(戰死)했다.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정수번(鄭守藩) : 자는 정보(貞甫). 1603년(선조36) 무과에 급제한 후 내금위장(內禁衛將)을 역임하였으며 난공2등(難

功二等)에 책록되었다.

 정유성(鄭維城)은 포은(圃隱)의 9대손이다. 인조 5년 문과에 올라 황해(黃海)ㆍ전라(全羅)ㆍ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

察使)를 지내고 호조(戶曹)ㆍ예조(禮曹)ㆍ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현종 때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청빈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은대일기(銀臺日記)’가 남아 전한다.

정준(鄭儁)은 정보(鄭保)의 후손으로 장흥고주부(長興庫注簿)로 있다가 병자호란 뒤 삼전도(三田渡)에 비(碑)를 세울

 때 와서별제(瓦署別提)를 제수하였으나, 치욕스런 일이라하여 이를 거절, 강원도 통천(通川)으로 숨어가 살았다. 주자

학 일변도이던 조선조 사상계에서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하여 독특하며 가오학파의 터를 잡은 이는 정유성(鄭維城)의

 손자인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이 있어 강화에 은거하며 학문연구에만 몰두, 백가(百

家)에 통달하였다. 조선후기 최고의 학자인 다산(茶山)이 자신의 강진 유배 기간 동안의 학문 연구를 후회하면서 감탄

해 마지 않던 강화학의 깊이는 이미 시초부터 뿌리가 튼튼했던 것이다. 그는 관념론적인 주자(朱子)의 유교(儒敎) 경전

해석에 정면으로 도전,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실천유학을 주창한 왕양명(王陽明)의 학설을 받아들였다. 주자학(朱子學)만이 유학의 정통으로 높여지고 그에 대한 이론이나 반박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이단시되던 풍토에서 그

는 학자적 양심으로 학문의 참된 길을 찾아 생활 속에 유학을 발전시켰다. 그에 의해 우리나라의 양명학은 체계를 잡게

 된다. 또 당시 사상계를 휩쓸어 가던 실학(實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학문과 덕행으로 명성이 있어서 숙종조 이래

 조정중신들의 30여 차례에 걸친 천거로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호조(戶曹)참의ㆍ대사헌ㆍ호조참판ㆍ우찬성

 등을 마지못해 잠깐씩 지냈을 뿐 학문에만 힘썼다.

아들 정후일(鄭厚一)이 가학을 전하였다. 그의 현손(玄孫) 정문승(鄭文升)은 고종 때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냈는데

 산수화의 명인으로 꼽혔다. 효종 때의 학자 정극후(鄭克後), 영조 때의 어영(御營)대장 정찬술(鄭纘述)(포은(圃隱)의

 11대손) 등은 모두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의 후손들이다.

 정호인(鄭好仁)은 자(字)는 자견(子見), 호(號)는 양계(暘溪). 1597년(선조30년)에 나서 광해(光海) 10년에 진사(進

士)가 되고 인조(仁祖) 5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역임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부

원수(副元帥)가 되어 향병(鄕兵)을 모집하였고 만년(晩年)에는 벼슬을 버리고 학문을 닦고 후진 양성(養成)에 진력하

였다. 대구(大邱) 청호서원(靑湖書院)에 향사(享祀)했다.

 정만양(鄭萬陽)의 자(字)는 경순(景醇), 호(號)는 훈수(塤叟). 1664년(현종5년)에 나서 학문(學問)에 전심(專心), 도학

(道學)과 문장(文章)에 뛰어났으며 과거(科擧)에 뜻을 두지 않았다. 경종4년에 참봉(參奉)을 제수하였으나 부임(赴任)

하지 않았고 영조(英祖) 때 학행(學行)으로 참봉세마(參奉洗馬)에 천거되었다. 곤지록(困知錄) 등 수많은 저서(著書)가

 있다.

정규양(鄭葵陽)의 자(字)는 숙향(叔向), 호(號)는 지수(篪叟). 1667년(현종8년)에 나서 형 만양(萬陽)과 함께 경서(經

書)와 사기(史記)를 피람(披覽)하여 학문(學問)과 문장(文章)에 뛰어나고 관도(官道)에 뜻을 두지 않았다. 숙종 25년

 현릉참봉(顯陵參奉)이 제수되었으나 부임(赴任)하지 않았다. 당대 영남(嶺南) 사림(士林)의 태두(泰斗)였다.

 정중기(鄭重器) : 1685(숙종11)~1757년(영조33) 조선의 문신. 자는 도옹(道翁), 호는 매산(梅山). 석달(碩達)의 아들

로 이형상(李衡祥)의 문인이다. 1727년(영조3) 생원(生員)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에 급제, 1731년 주서

(注書)가 되고, 이어 결성현감(結城縣監)으로 나가 이도(吏道)를 바로 잡고 여씨향약(呂氏鄕約)에 의거하여 향속(鄕俗)

의 순화(醇化)에 노력했으며, 정언(正言)을 거쳐 1753년(영조29)지평(持平)이 되고, 뒤에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이르

렀다.

정환직(鄭煥直)은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수차에 걸쳐 전공을 세운 뒤, 적의 대부대를

 만나 동대산(東大山)에 피체, 영천에서 순직했다.

정용기(鄭鏞基)는 을사조약 때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의 명(命)을 받아 의병(義兵)을 일으켜 산남진대장(山南陣大將)

이 되었고 영천(永川)을 중심으로 크게 기세(氣勢)를 떨쳤으나 뒤에 전투(戰鬪) 중 체포되어 순직했다. 부자(父子)의

충효대절(忠孝大節)을 추모하여 방명(坊名)을 충효동(忠孝洞)이라 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감무공파(監務公派) 영일정씨(迎日鄭氏) 감무공파(監務公派)의 후손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조선중기의 정치가요

 문인이었던 송강(松江) 정철(鄭澈)을 들 수 있다. 이 파(派)에서는 조선조에 상신(相臣) 4명과 3명의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하는 등 융성을 누렸다. 감무공(監務公) 정극유(鄭克儒)의 후손은 4세조까지는 단계(單系)로 이어졌고, 5세조 이

후의 후손에서 몇 개 파(派)로 나누어졌다. 정사도(鄭思道)의 아들인 7세조 정홍(鄭洪)의 후손이 공간공파(恭簡公派)

이고, 그 아들 정진(鄭鎭)의 후손이 정원공파(靖元公派), 정연(鄭淵)의 후손이 정숙공파(貞叔公派)이다. 정원공(靖元

公)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세 아들의 후손이 각각 강화공파(江華公派), 원평공파(原平公派), 부마공파(駙

馬公派)로 나누어졌다. 정숙공(貞叔公)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그 후손이 각각 판결사공파(判決事公派)ㆍ이의공

파(吏議公派)ㆍ위양공파(威襄公派)ㆍ김제공파(金堤公派)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5세조 정후의 후손은 정남승(鄭南

升)-정여해(鄭汝諧)의 단계로 이어져 오성군파(烏城君派)로 나누어졌다. 고려조의 인물 정사도(鄭思道)는 충숙왕 복

위(復位) 5년 문과(文科)에 급제,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친 뒤 공민왕 때 동북면상원수(東北面上元帥)ㆍ도순문사(都

巡問使)를 역임하고 우왕 때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올랐다. 오천군(烏川郡)에 봉해지고 공신이 되었다. 정홍(

)은 정사도(鄭思道)의 아들로 우왕 3년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조선조에 들어와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지내고,

 공간(恭簡)의 시호가 내렸다. 오성군(烏城郡) 정후는 삼중대광(三重大匡)의 관계에 올랐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은

돈녕부판관(敦寧府判官) 정유침(鄭惟沈)의 막내 아들이며,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두 누이는 왕실과 결혼, 큰 누이는

 인종의 후궁이 되었고, 둘째 누이는 종실 계림군(桂林君)의 부인이 되었다. 그가 열 살 되던 때인 을사년(乙巳年)

(1545)에 사화(士禍)가 일어나고 계림군(桂林君)이 여기에 연루된다. 큰 형은 귀양길에 죽고 아버지는 정평(定平), 연

일(延日)에서 5년 동안 귀양살이를 한다. 송강(松江)은 그 동안 창평현(昌平縣)에서 그 곳 부호의 도움으로 인근에 낙

향했거나 귀양와 있던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ㆍ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ㆍ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 등 석학

(碩學)들에게 학문을 배우고 문장을 익혔다. 송강은 나중 그가 젊은 날을 보낸 이곳의 경승을 ‘성산별곡(星山別曲)’으

로 남겼는데 창평(昌平)은 바로 송강의 문학적 감수성과 정서를 살찌운 고향인 셈이다. 이 수학기간에 그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계(牛溪) 성혼(成渾)과도 교분을 맺어 훗날 조정에서 함께 일하게 된다. 27세 되던 명종 17년 문과(文

科)에 급제,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가, 명종 22년에 이이와 같이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그 때는 이미 동

(東)ㆍ서(西)의 당쟁이 노골화하던 때였는데 정철(鄭澈)은 어느 틈에 서인(西人)의 거두가 동인(東人)되어 이발(李潑)

 일파와 맞서게 되었다. 선조 13년 마침내 반대당에게 밀려 강원도 관찰사로 나아가 조용히 관동팔경을 벗하여 지냈

다. 이듬해 다시 조정에 돌아왔으나 동인들의 세력이 굳어져 있어 관직을 사퇴하고 창평(昌平)에 물러가 있었다. 선조

 22년 다시 부름을 받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으나 얼마 후 다시 동인(東人)에게 밀려나 명천(明川), 진주(晋州), 강계

(江界) 등지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지인 강계에서 풀려났다. 57세에 사은사(謝恩使)로 명(明)에 다녀온 후 다시 반대파의 탄핵을 받자 강화로 낙향, 그곳에서 빈곤과 더불어 울분 속에서 병사했다. 사후 반대당의 참소로 벼슬이 박탈됐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상소로 관직이 복구됐으며 숙종 10년 문청공(文淸公)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송강(松江)은 본래 성질이 바른 말을 잘하는 데다 당화(黨禍)를 입어 거의 평생을 귀양살이로 마쳤지만, 학문이 깊고 시를 잘 지었으니, 강원도관찰사로 있을 때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 어린 시절을 보낸 창평 성산(星山)을 읊은 ‘성산별곡(星山別曲)’을 비롯하여 우리말로 된 수 많은 가사(歌辭)들은 국문학상의 일품들이다. “…송근(松根)을 베여누여 풋잠을 얼풋 드니 꿈애 한 사람이 날더러 이른 말이 그대를 내 모르냐 상계(上界)의 진선(眞仙)이라 황정경(黃庭經) 일자(一字)를 어찌 그릇 읽어두고 인간(人間)에 내려와서 우리를 따르난다. 저근덧 가지마오 이 술 한잔 먹어보오 북두성(北斗星) 기울여 창해수(滄海水) 부어내어 저 먹고 날 먹거늘 서너 잔 기울이니 화풍(和風)이 습습(習習)하야 양액(兩腋)을 추켜드니 구만리(九萬里) 장공이 져기면 날리로다. 이 술 가져다가 四海에 고로 나눠 억조창생(億兆蒼生)을 다 취게 만든 후에 그제야 고쳐앉아 또 한잔 하잤고야. 말지자 학을 타고 구공(九空) 중에 올라가니 공중(空中)의 옥소(玉簫)소리 어제던가 그제런가. 나도 잠을 깨어 바다를 굽어보니 깊이를 모르거든 가인들 어찌 알리 명월(明月)이 천산만락(千山萬落)에 아니 비친 데 없다…“ (‘관동별곡(關東別曲)’의 마지막 부분) 세종 때에 한글이 창제되었으나 한글은 문학표현의 수단이 되지 못하고 언문으로 천시받았다. 그러던 것이 송강(松江)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문학을 표현하는 언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송강은 그보다 50여년 후 등장하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한글문학의 초석을 놓은 공헌을 하였다. 앞에서 든 별곡(別曲) 외에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장진주사(將進酒辭)’ 및 시조 70여수가 전한다. 송강(松江)의 아들 정홍명(鄭弘溟)은 사계(沙溪)의 제자로 인조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그의 형 정종명(鄭宗溟)은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있을 때 아버지 송강이 죽은 뒤 벼슬이 삭탈되자 이를 항변하다가 그마저 벼슬을 빼앗기기도 했다. 문경공(文敬公) 정호(鄭澔)는 송강(松江)의 현손(玄孫)으로 영일(迎日) 정씨(鄭氏) 후손으로 유일하게 영의정(領議政)이 된 인물이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제자로 당쟁에서는 스승과 함께 노론(老論)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숙종 10년 등과(登科)하고 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경종 원년 실록청 총재관(摠裁官)으로 ‘숙종실록’ 편찬에 참여하다가 신임사화(辛壬士禍)로 파직, 강진에 유배되었다. 영조 원년(元年) 노론의 집권으로 풀려나와 우의정(右議政)에 특진되고 이어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치사(致仕)했다. 정호(鄭澔)의 손자인 정종(鄭宗) 역시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으며, 증손 정이환(鄭履煥)은 참판(參判)ㆍ제학(提學)을 지내는 등 영일정씨(迎日鄭氏)의 가계에서 가장 융성을 누렸다. 영조조에 〈형제정승〉으로 이름을 날린 정우량(鄭羽良)(우의정(右議政))과 정휘량(좌의정(左議政))은 송강(松江)의 방손(傍孫)이다. 아버지 정수기(鄭壽期) 또한 판서를 지냈는데, 현제가 모두 문장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 중 정휘량은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 소론(少論) 축출을 주장하고 우의정(右議政)직을 사임한 인물로 어쩌면 그의 방조(傍祖) 송강의 성격을 연상하게 한다. ‘남애집(南崖集)’, ‘견사록(見思錄)’ 등이 남아있다. 한말의 인물인 정기원(鄭岐源)은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당시 강화진무사로 재직 중, 불법으로 침입해 온 미국의 행위에 항의, 통상교섭을 거절했다. 정경원(鄭敬源)은 한말 외세에 의지해 이른 바 개화(開化)를 이룩하려한 친일 김홍집내각에 참여한 인물이다. 갑오경장(甲午更張) 후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자 그 회의원에 선출되고, 이어 김홍집내각의 법부협판(法部協辦)이 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정낙용(鄭洛鎔)은 갑오년 관제개편 후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등을 역임하고, 1910년 일본의 대한제국 강점 후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아 남작(男爵)이 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정동식(鄭東植), 정재건(鄭在健)은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 후 포고문(布告文)이나 토부문(討賦文) 따위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항렬표(行列表)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

역대 주요 인물

▲고려조

정습명(鄭襲明)(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사도(鄭思道)(정당문학(政堂文學))
정몽주(鄭夢周)(성리학자(性理學者))
정홍(鄭洪)(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조선조

정종성(鄭宗誠)(이조참의(吏曹參議))
정종본(鄭宗本)(사예(司藝)) 정연(鄭淵)(병판(兵判))
정신석(鄭臣碩)(헌납(獻納)) 정종소(鄭從韶)(사성(司成))
정효전(鄭孝全)(병판(兵判)) 정윤화(鄭允和)(정자(正字))
정보(鄭保)(감찰(監察)) 정이교(鄭以僑)(장령(掌令))
정회(鄭淮)(부제학(副提學)) 정이득(鄭以得)(지평(持平))
정수(鄭洙)(군수(郡守)) 정순(鄭洵)(첨지중추(僉知中樞))
정두형(鄭斗亨)(승지(承旨)) 정언호(鄭彦浩)(집의(執義))
정완(鄭浣)(정랑(正郞)) 정광윤(鄭光胤)(한림(翰林))
정포렴(鄭布廉)(지평(持平)) 정자(鄭滋)(정랑(正郞))
정철(鄭澈)(좌의정(左議政)) 정응성(鄭應聖)(수사(水使))
정대임(鄭大任)(군수(郡守)) 정유번(鄭維藩)(군수(郡守))
정의번(鄭宜藩)(의병장(義兵將)) 정종명(鄭宗溟)(부사(府使))
정홍명(鄭弘溟)(대제학(大提學)) 정립(공참(工參))
정극후(鄭克後)(대군사부(大郡師傅)) 정담(鄭湛)(헌납(獻納))
정사명(鄭四溟)(군수(郡守)) 정호인(鄭好仁)(부사(府使))
정시성(鄭始成)(관찰사(觀察使)) 정승명(鄭承明)(부사(府使))
정시대(鄭始大)(목사(牧使)) 정계주(승지(承旨))
정유성(鄭維城)(우의정(右議政)) 정도성(鄭道成)(지평(持平))
정양(鄭瀁)(장령(掌令)) 정제태(鄭齊泰)(부윤(府尹))
정식(승지(承旨)) 정천(현감(縣監))
정수기(鄭壽期)(판돈녕(判敦寧)) 정해(鄭楷)(부윤(府尹))
정택하(鄭宅河)(승지(承旨)) 정광제(鄭匡濟)(참의(參議))
정익하(鄭益河)(형판(刑判)정홍제(鄭弘濟)(부윤(府尹)
정제두(鄭齊斗)(이참(吏參)(정호(鄭澔)영의정(領議政))
정우량(鄭羽良)(우의정(右議政))
정휘량(左議政) 정당(鄭棠)(대제학(大提學))
정하언(鄭夏彦)(대사간(大司諫))
정준일(鄭俊一)(관찰사(觀察使)) 정후겸(鄭厚謙)(참판(參判))
정권(鄭權)(승지(承旨)) 정시린(鄭時麟)(전적(典籍))
정간(鄭幹)(승지(承旨)) 정문계(鄭文啓)(참의(參議))
정중기(鄭重器)(참의(參議)) 정유(지평(持平))
정방(鄭枋)(병참(兵參)) 정원달(鄭遠達)(공참(工參))
정민하(鄭敏河)(학자(學者)) 정이환(鄭履煥)(부제학(副提學))
정경인(鄭景仁)(오위장(伍衛將))
정상인(鄭象仁)(대사간(大司諫)) 정일겸(鄭日謙)(승지(承旨))
정의달(鄭義達)(교리(敎理)) 정충필(鄭忠弼)(학자(學者))
정의(형참(刑參)) 정문승(鄭文升)(판의금(判義禁))
정기원(鄭岐源)(병사(兵使)) 정류(대사간(大司諫))
정환익(鄭煥翼)(공참(工參)) 정낙용(鄭洛鎔)(호참(戶參))
정경원(鄭敬源)(관찰사(觀察使)) 정동식(鄭東植)(첨정(僉正))
정재건(鄭在健)(지평(持平)) 정관검(鄭觀儉)(서예가(書藝家))
정환직(鄭煥直)(의병장(義兵將))

▲근대(近代)

정동식(鄭東植)(순국의사)
정재건(鄭在健)(순국의사)
정용기(鄭鏞基)(의병장)


[등과인명(登科人名)]

▲고려조

문과(文科)
정사도(鄭思道)(충숙왕조)
정몽주(鄭夢周)(공민왕조)
정홍(鄭洪)(우왕조)

▲조선조

문과(文科)
정종지(鄭宗支)(헌납(獻納)) 정신석(鄭臣碩)(부사(府使))
정종소(鄭從韶)(사성(司成)) 정윤화(鄭允和)(지평(持平))
정자청(鄭自淸)(현감(縣監)) 정지소(鄭至韶)(학유(學諭))
정치소(鄭致韶)(공좌(工佐)) 정이공(鄭以恭)(지평(持平))
정이교(鄭以僑)(이랑(吏郞)) 정회(鄭淮)(부학(副學))
정이득(鄭以得)(지평(持平)) 정수(鄭洙)(군수(郡守))
정순(鄭洵)(판결(判決)) 정휘(鄭輝)(학유(學諭))
정완(鄭浣)(이정(吏正)) 정언호(鄭彦浩)(전한(典翰))
정광윤(鄭光胤)(한림(翰林)) 정희렴(鄭希廉)(교리(校理))
정경우(鄭景祐)(현감(縣監)) 정자(鄭滋)(형정(刑正))
정철(鄭澈)(좌상(左相)) 정삼섭(鄭三燮)(좌랑(佐郞))
정종명(鄭宗溟)(승지(承旨)) 정근(鄭謹)(승박(承博))
정립(공참(工參)) 정사(鄭泗)(공정(工正))
정대해(鄭大海)(동지(同知)) 정유번(鄭惟藩)(장령(掌令))
정전(강도(江都)) 정홍명(鄭弘溟)(대헌(大憲))
정담(鄭湛)(지평(持平)) 정심(鄭沁)(설서(說書))
정사준(鄭四雋)(군수(郡守)) 정석명(鄭碩溟)(직강(直講))
정류(鄭流)(지평(持平)) 정유성(鄭維城)(좌상(左相))
정호인(鄭好仁)(목사(牧使)) 정시성(鄭始成)(강백(江伯))
정승명(鄭承明)(지평(持平)) 정계주(鄭繼周)(승지(承旨))
정시대(鄭始大)(목사(牧使)) 정숙주(鄭叔周)(예정(禮正))
정도성(鄭道成)(정언(正言)) 정제태(鄭齊泰)(승지(承旨))
정호(鄭澔)(영상(領相)) 정식(응교(應敎))
정수기(鄭壽期)(판돈(判敦)) 정서하(鄭瑞河)
정해(鄭楷)(부윤(府尹)) 정사대(鄭思大)(현감(縣監))
정택하(鄭宅河)(승지(承旨)) 정광제(鄭匡濟)(승지(承旨))
정익하(鄭益河)(판서(判書)) 정홍제(鄭弘濟)(부윤(府尹))
정우량(鄭羽良)(영상(領相)) 정권(鄭權)(승지(承旨))
정준일(鄭俊一)(전백(全伯)) 정하언(鄭厦彦)(승지(承旨))
정중기(鄭重器)(지평(持平)) 정시린(鄭時麟)(찰방(察訪))
정석후(봉주(奉主)) 정휘량(좌상(左相))
정포(판서(判書)) 정한규(鄭漢奎)(아장(亞將))
정방(鄭枋)(판서(判書)) 정원달(鄭遠達)(참의(參議))
정이환(鄭履煥)(참판(參判)) 정반(鄭槃)(문학(文學))
정경인(鄭景仁)(승지(承旨)) 정상인(鄭象仁)(참판(參判))
정래겸(鄭來謙)(정언(正言)) 정유(지평(持平))
정후겸(鄭厚謙)(참판(參判)) 정복환(鄭福煥)(승지(承旨))
정도복 정재언(鄭道復 鄭在言)(옥당(玉堂))
정일겸(鄭日謙)(승지(承旨)) 정의달(鄭義達)(옥당(玉堂))
정극환(鄭克煥) 정문계(鄭文啓)(목사(牧使))
정래백(鄭來百)(이의(吏議)) 정혐
정로영(鄭魯榮)(승지(承旨)) 정만석(鄭晩錫) 정일태(鄭日泰)
정조영(鄭祖榮)(형판(刑判)) 정도채(鄭度采)(승지(承旨))
정시겸(鄭時謙)(교리(校理)) 정재건(鄭在健)(정언(正言))
정환익(鄭煥翼)(판서(判書)) 정류(판서(判書))
정희(鄭熹)(교리(校理))
정운(鄭澐)(장령(掌令)) 정해상(鄭海尙)(판서(判書))
정해식(鄭海式)(승지(承旨)) 정해용(鄭海瑢)(지평(持平))
정해륜(鄭海崙)(판서(判書)) 정해두(鄭海斗)(장령(掌令))
정해관(鄭海觀)(이참(吏參)) 정규섭(鄭圭燮)(승지(承旨))
정현(鄭玹)(지평(持平)) 정승검(鄭昇儉)(지평(持平))
정현재(鄭顯載)(지평(持平)) 정한원(鄭漢源)(참판(參判))
정이원(鄭履源)(참판(參判)) 정하원(鄭夏源)(참판(參判))
정세원(貞世源)(참판(參判)) 정경원(鄭敬源)(승지(承旨))
정원하(鄭元夏)(참판(參判)) 정운경(鄭雲景)(승지(承旨))
정운익(鄭雲益)(은대(銀臺)) 정운기(鄭雲琦)(승지(承旨))

무과(武科)
정주한(鄭周翰)(현감(縣監)) 정도징(鄭道徵)(수사(水使))
정찬구(鄭纘逑)(어장(御將)) 정익제(鄭翼濟)(부사(府使))
정관채(鄭觀采)(병사(兵使)) 정환종(鄭煥宗)(병사(兵使))
정인기(鄭寅基)(방어사(防禦使))
정락용(鄭洛鎔)(대장(大將)·판서(判書))
정주영(鄭周永)(판서(判書)) 정수송(鄭壽松)(총융사(摠戎使))
정익량(鄭益良)(병사(兵使)) 정려원(鄭驪源)(방어사(防禦使))
정운두(鄭雲斗)(군수(郡守)) 정운익(鄭雲翼)(통제사(統制使))
정운삼(鄭雲參)(병사(兵使)) 정운성(鄭雲星)(판윤(判尹))
정기택(鄭麒澤)(통수(統帥))


[조선조 급제자 정록]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

종본(宗本)(태종(太宗) 1년·증광시(增廣試)·진사(進士))
종소(從韶)(세종(世宗) 29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종소(從韶)(세종(世宗) 29년·중시(重試)·을과삼(乙科三))
윤화(允和)(단종(端宗) 1년·증광시(增廣試)·정과(丁科))
지소(至韶)(단종(端宗) 2년·증광시(贈廣試)·병과(丙科))
치소(致韶)(세조(世祖) 8년·식년시(式年試)·정과(丁科))
이교(以僑)(성종(成宗) 1년·별시(別試)·병과(丙科))
이득(而得)(성종(成宗) 17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이교(以僑)(성종(成宗) 21년·중시(重試)·병과(丙科))
휘(輝)(중종(中宗) 14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광윤(光胤)(중종(中宗) 18년·알성시(謁聖試)·을과(乙科))
희렴(希廉)(중종(中宗) 20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경우(景祐)(중종(中宗) 35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두형(斗亨)(중종(中宗) 39년·별시(別試)·병과(丙科))
삼섭(三燮)(선조(宣祖) 10년·별시(別試)·병과(丙科))
근(謹)(선조(宣祖) 27년·별시(別試)·병과(丙科))
유번(維藩)(선조(宣祖) 27년·별시(別試)·병과(丙科))
사명(四溟)(광해(光海) 10년 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호인(好仁)(인조(仁祖) 5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유성(維城)(인조(仁祖) 5년·강도정시(江都庭試)·을과(乙科))
승명(承明)(인조(仁祖) 24년·강도정시(江都庭試)·병과(丙科))
계주(효종(孝宗) 1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숙주(叔周)(숙종(肅宗) 4년·별시(別試)·병과(丙科))
제태(齊泰)(숙종(肅宗) 8년·춘당대(春塘臺)·병과(丙科))
사대(思大)(숙종(肅宗) 37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권(權)(영조(英祖) 1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중기(重器)(영조(英祖) 3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시린(時麟)(영조(英祖) 7년·함경도별시(咸鏡道別試)·병과(丙科))
준일(俊一)(영조(英祖) 11년·정시(庭試)·병과(丙科))
경인(景仁)(영조(英祖) 38년·정시(庭試)·병과(丙科))
상인(象仁)(영조(英祖) 41년·알성시(謁聖試)·병과(丙科))
호인(好仁)(영조(英祖) 42년·정시(庭試)·병과(丙科))
도복(道復)(영조(英祖) 47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문계(文啓)(영조(英祖) 51년·정시(庭試)·을과(乙科))
복(馥)(정조(正祖) 13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언인(彦仁)(정조(正祖) 13년·춘당대(春塘臺)·병과(丙科))
이운(履運)(정조(正祖) 13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도채(度采)(정조(正祖) 24년·정시(庭試)·병과(丙科))
유영(裕榮)(정조(正祖) 31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환익(煥翼)(헌종(憲宗) 13·정시(庭試)·병과(丙科))
원하(元夏)(고종(高宗) 13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운(澐)(고종(高宗) 13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규섭(圭燮)(고종(高宗) 13년·증광시(增廣試)·을과(乙科))
제호(濟鎬)(고종(高宗) 13년·알성시(謁聖試)·을과(乙科))
현(현)(고종(高宗) 27년·별시(別試)·병과(丙科))

(감무공파(監務公派))

신석(臣碩)(세종(世宗) 26년·식년시(式年試)·정과(丁科))
자청(自淸)(단종(端宗) 1년·증광시(增廣試)·정과(丁科)
회(淮)(성종(成宗) 5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수(洙)(성종(成宗) 21년·별시(別試)·을과(乙科))
순(洵)(중종(中宗) 5년·별시(別試)·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완(浣)(중종(中宗) 35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언호(彦浩)(중종(中宗) 15년·별시(別試)·병과(丙科))
자(滋)(중종(中宗) 35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철(澈)(명종(明宗) 17년·별시(別試)·갑과(甲科))
종명(宗溟)(선조(宣祖) 25년·용만별시(龍彎別試)·갑과(甲科))
립(선조(宣祖) 33년·별시(別試)·병과(丙科))
사(泗)(선조(宣祖) 34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대해(大海)(선조(宣祖) 36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홍명(弘溟)(광해(光海) 8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담(湛)(광해(光海) 8년·별시(別試)·병과(丙科))
심(沁)(광해(光海) 8년·별시(別試)·병과(丙科))
석준(碩儁)(광해(光海) 13년·알성시(謁聖試)·을과(乙科))
류(流)(인조(仁祖) 2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시성(始成)(인조(仁祖) 17년·별시(別試)·갑과(甲科))
시대(始大)(효종(孝宗) 2년·별시(別試)·갑과(甲科))
도성(道成)(현종(顯宗) 11년·별시(別試)·갑과(甲科))
호(澔)(숙종(肅宗) 10년·정시(庭試)·병과(丙科))
식(拭)(숙종(肅宗) 25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수기(壽期)(숙종(肅宗) 25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서하(瑞河)(숙종(肅宗) 25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해(楷)(숙종(肅宗) 31년·알성시(謁聖試)·병과(丙科))
택하(宅河)(숙종(肅宗) 41년·식년시(式年試)·갑과(甲科))
광제(匡濟)(숙종(肅宗) 43년·온양별시(溫陽別試)·병과(丙科))
익하(益河)(경종(景宗) 1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홍제(弘濟)(경종(景宗) 1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우량(羽良)(경종(景宗) 3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석후(영조(英祖) 9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하언(夏彦)(영조(英祖) 11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익량(翼良)(영조(英祖) 13년·별시(別試)·을과(乙科))
포(영조(英祖) 15년·정시(庭試)·을과(乙科))
한규(漢奎)(영조(英祖) 16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유(영조(英祖) 25년·알성시(謁聖試)·병과(丙科))
방(枋)(영조(英祖) 29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원달(遠達)(영조(英祖) 32년·정시(庭試)·갑과(甲科))
이환(履煥)(영조(英祖) 33년·정시(庭試)·병과(丙科))
반(槃)(영조(英祖) 25년·알성시(謁聖試)·을과(乙科))
래겸(來謙)(영조(英祖) 41년·알성시(謁聖試)·병과(丙科))
후겸(厚謙)(영조(英祖) 42년·정시(庭試)·을과(乙科))
복환(福煥)(영조(英祖) 42년·정시(庭試)·병과(丙科))
지환(趾煥)(영조(英祖) 47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재신(在信)(영조(英祖) 47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일겸(日謙)(영조(英祖) 48년·기로정시(耆老庭試)·병과(丙科))
의달(義達)(영조(英祖) 49년·정시(庭試)·을과(乙科))
극환(克煥)(영조(英祖) 51년·정시(庭試)·갑과(甲科))
래백(來百)(정조(正祖) 7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로영(魯榮)(정조(正祖) 14년·증광시(增廣試)·을과(乙科))
일태(日泰)(정조(正祖) 19년·정시(庭試)·병과(丙科))
조영(祖榮)(정조(正祖) 24년·정시(庭試)·병과(丙科))
재용(在瑢)(순조(純祖) 16년·식년시(式年試)·갑과(甲科))
류(순조(純祖) 31년·식년시(式年試)·갑과(甲科))
한원(漢源)(헌종(憲宗) 13년·정시(庭試)·병과(丙科))
해상(海尙)(철종(哲宗) 6년·정시(庭試)·병과(丙科))
해륜(海崙)(철종(哲宗) 9년·정시(庭試)·병과(丙科))
해용(海瑢)(철종(哲宗) 12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희(喜)(고종(高宗) 2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운기(雲琦)(고종(高宗) 16년·정시(庭試)·병과(丙科))
하원(夏源)(고종(高宗) 17년·증광시(增廣試)·을과(乙科))
세원(世源)(고종(高宗) 20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이원(履源)(고종(高宗) 22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재건(在健)(고종(高宗) 25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운경(雲景)(고종(高宗) 26년·알성시(謁聖試)·병과(병과))
관해(觀海)(고종(高宗) 27년·노로유생과(魯老儒生科)·갑과(甲科))
경원(敬源)(고종(高宗) 27년·별시(別試)·병과(丙科))
성검(晟儉)(고종(高宗) 28년·정시(庭試)·병과(丙科))
해두(海斗)(고종(高宗) 28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현재(顯載)(고종(高宗) 29년·별시(別試)·병과(丙科))
해식(海式)(고종(高宗) 29년·별시(別試)·병과(丙科))


[벌열(閥閱)(양계(兩系)통합)]

●상신(相臣)
: 정철(鄭澈)(선조조 좌의정(左議政))
정유성(鄭維城)(현종조 우의정(右議政))
정호(鄭澔)(영조조 영의정(領議政))
정우량(鄭羽良)(영조조 우의정(右議政))
정휘량(영조조 좌의정(左議政))
●공신(功臣)
: 정철(鄭澈)(선조조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 2등공신(等功臣), 종계변무(宗系辨誣) 3등공신(等功臣))
●문형(文衡)
: 정철(鄭澈)(선조조)
정홍명(鄭弘溟)(광해군 인조조)
정실(鄭實)(영조조)
정휘량(영조조)
정우량(鄭羽良)(영조조)
정제두(鄭齊斗)(정조조)
●호당(湖當)
: 정철(鄭澈)(명종조)
정홍명(鄭弘溟)(인조조)
정유성(鄭維城)
정우량(鄭羽良)
경연(經筵) : 정양(鄭瀁)(현종조·진선(進善))
정제두(鄭齊斗)(정종조 찬성(贊成))
●청백리(淸白吏)
: 정보(鄭保)(단종조)
정철(鄭澈)(명종조)
정우량(鄭羽良)(영조조)
정실(鄭實)(영조조)
●절의(節義)
: 정대임(鄭大任)(임진왜란(壬辰倭亂)·의병장(義兵將))
정재건(鄭在健)(항일순절제인(抗日殉節諸人)·경술합방(庚戌合邦))
●장신(將臣)
: 정수송(鄭壽松)(영조조·총융사(摠戎使))
정찬술(鄭纘述)(영조조·어영대장(御營代將))
정기원(鄭岐源)(고종조·총융사(摠戎使))
정락용(鄭洛鎔)(고종조·후영사(後營使))
●명륜(明倫)
: (효행(孝行)) 정씨(鄭氏)(진정원(陳貞源)의 처(妻)·증내부주사(贈內部主事))
정계요(鄭繼堯)(인조조·정려(旌閭))
●문집(文集)
: 서악력(西岳歷)(정극후(鄭克後)) 포은집(圃隱集)(정몽주(鄭夢周)) 소은유고(簫隱遺稿)(정민하(鄭敏河)) 곤지록(困知錄)(정만양(鄭萬陽)) 이기집설(理氣輯說)(정만양(鄭萬陽)) 가례차의(家禮箚疑)(정만양(鄭萬陽)) 개장비요(改葬備要)(정만양(鄭萬陽)) 의례편고(疑禮便考)(정만양(鄭萬陽)) 상지록(尙志錄)(정만양(鄭萬陽))慕懸錄(모현록)(정만양(鄭萬陽)) 심경질의보유(心經質疑補遺)(정만양(鄭萬陽)) 계몽해의(啓蒙解疑)(정만양(鄭萬陽))) 외국지(外國誌)(정만양(鄭萬陽)) 산거일기(山居日記)(정만양(鄭萬陽)) 훈지록(정만양(鄭萬陽)) 은대일기(銀臺日記)(정유성(鄭維城)) 존언(存言)(정제두(鄭齊斗)) 성학설(聖學說)(정제두(鄭齊斗)) 논어해(論語解)(정제두(鄭齊斗)) 대학설(大學說)(정제두(鄭齊斗)) 중용해(中庸解)(정제두(鄭齊斗)) 정문유훈주정성서(程門遺訓註定性書)(정제두(鄭齊斗)) 경학서성(經學書成)(정제두(鄭齊斗)) 하곡집(霞谷集)(정제두(鄭齊斗)) 화곡집(華谷集)(정종명(鄭宗溟)) 매산집((梅山集)(정중기(鄭重器)) 송강집(松江集)(정철(鄭澈)) 송강가사(松江歌辭)(정철(鄭澈)) 송강별추록유사(松江別追錄遺嗣)(정철(鄭澈)) 문암집(文巖集)(정호(鄭澔)) 기암집(畸庵集)(정홍명(鄭弘溟)) 기옹만필(畸翁漫筆)(정홍명(鄭弘溟)) 남애집(南崖集)(정휘량) 견사록(見思錄)(정휘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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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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